생캉탱 (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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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캉탱 (앵)은 프랑스 앤주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 시대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솜 강을 가로지르는 도하 지점에 위치했다. 중세 시대에는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수도였으며, 12세기 후반 자치 헌장을 획득하여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백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557년 전투에서 파괴된 후 18세기 직물 산업의 번영을 누렸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 아르데코 건축물과 문화 유산이 남아있다. 파리, 랭스, 아미앵 등과 기차 및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카이저슬라우테른, 로더럼,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 퉁저우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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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캉탱 (엔주)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생캉탱 |
현지 이름 | 생캉탱 (프랑스어) 생킨틴 (피카르디어) 신트-크윈턴스 (네덜란드어 - 과거) |
지위 | 소현 (Subprefecture) |
행정 구역 | |
국가 | 프랑스 |
레지옹 | 오드프랑스 |
데파르트망 | 엔주 |
아롱디스망 | 생캉탱 |
캉통 | 생캉탱-1, 2, 3 |
코뮌 코드 | 02691 |
우편 번호 | 02100 |
시장 | 프레데리크 마카레즈 |
임기 | 2020–2026년 |
복합 자치체 | CA 생캉티누아 |
지리 | |
좌표 | 49°50′55″N 3°17′11″E |
해발 고도 | 평균: 74 m 최소: 68 m 최대: 125 m |
면적 | 22.56 km2 |
인구 | |
총 인구 | 59,066명 (2008년) |
인구 밀도 | 2,618.2명/km2 |
기타 정보 | |
INSEE 코드 | 02691 |
2. 역사
thumb
생캉탱은 중세 초기부터 생캉탱 바실리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수도원은 로마 기독교 순교자인 생 캉탱의 무덤 순례지로 유명했으며, 도시 이름도 그에게서 유래했다.[1]
15세기 말과 17세기 중반 사이, 생캉탱은 전략적 위치 때문에 불행을 겪었다.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에 포위되어 약탈당하고 2년 동안 버려졌다. 1559년 프랑스에 반환된 후 대대적인 요새화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는 전쟁, 흑사병(1636년 3,000명 사망),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의 정복으로 국경이 이동하면서 생캉탱은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다. 16세기 말부터 직물 생산은 고급 아마포 캔버스(''바티스트''와 론)를 전문으로 했으며, 18세기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되어 번영을 가져왔다.
프랑스 제1제국 시대에는 수출 시장의 어려움으로 경제가 쇠퇴했다. 나폴레옹은 도시 성장을 위해 요새 철거를 명령했다. 1814-1815년에는 러시아군에 점령되었지만 피해는 없었다.
19세기 생캉탱은 직물과 기계 장치를 중심으로 산업 도시로 발전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프로이센군을 격퇴했지만 함락되었다. 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71년 1월 19일 프랑스군은 이 도시 근처에서 패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생캉탱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4년 9월 점령되어 가혹한 점령을 겪었고, 1916년부터 힌덴부르크 선에 통합되어 전쟁의 중심에 놓였다. 주민 대피 후 도시는 약탈당하고 산업 설비가 파괴되었으며, 전투로 건물 80%가 손상되었다.( 생캉탱 바실리카 포함)
재건은 오래 걸렸고, 1950년대 중반에야 1911년 수준의 인구를 회복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번영했으나, 이후 섬유 산업이 개발 도상국과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 1. 고대 로마 시대
생캉탱은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비로만두이족의 수도로 건설되었으며, '비로만두이의 아우구스타'라는 뜻의 "아우구스타 비로만두오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이곳은 솜 강을 가로지르는 도하 지점이었다.[1] 로마 시대 후기에 치비타스의 수도가 다시 베르망드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생캉탱에서는 4세기에 관련된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1]2. 2. 중세 시대
9세기부터 생캉탱은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수도였다. 10세기부터 베르망두아 백작(카롤링거 왕조, 그 후 카페 왕조 가문의 후손)은 매우 강력했다.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여 부르주아지는 조직화되었고 12세기 후반(매우 이른 시기)에 자치 헌장을 획득하여 중세 코뮌에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했다.13세기 초에 생캉탱은 중세 프랑스의 왕령지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양모 직물 산업(도시 "드라팡트")을 기반으로 번성하는 도시였다. 또한 샹파뉴 박람회와 플랑드르 도시(포도주 수출 등) 사이의 프랑스 왕국 국경에 위치하여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중요한 연례 박람회가 열렸다. 또한 풍요로운 농업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곡물과 구에드(쪽)의 거래로 이익을 얻었다.
14세기부터 생캉탱은 이러한 전략적 위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백년 전쟁으로 고통받았고, 15세기에는 프랑스 국왕과 부르고뉴 공작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다(소므 지역의 도시 중 하나). 여러 차례 흑사병으로 황폐화되면서 인구는 감소했고,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박람회는 점점 쓸모없어졌고, 농업 생산량은 감소했다. 쇠퇴하는 직물 산업은 린넨 캔버스 생산으로 전환했다. 한편, 도시는 요새와 무장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2. 3. 근세 시대
1557년 유럽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생캉탱에서 충돌했다. 네덜란드에서 공격해 온 스페인은 초반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생캉탱을 함락시키기까지는 약 한 달이 걸렸다.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파리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생캉탱 공격에 어려움을 겪은 후,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결했다. 그는 생캉탱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1563년 마드리드 인근 엘 에스코리알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건설을 명했다.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의 적극적인 북방 영토 확장 정책으로 생캉탱은 국경 근처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19세기 초 성벽은 해체되었다.
2. 4. 근대
1557년 유럽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생캉탱에서 충돌했다. 네덜란드에서 공격해 온 스페인은 첫 단계에서 큰 타격을 입혔지만, 생캉탱을 함락시키기까지 약 한 달이 걸렸다.전투가 끝난 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150km 정도 떨어진 파리 공격을 단념하고,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전쟁을 끝냈다. 스페인 국왕은 생캉탱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사자들을 위한 보상으로 1563년에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건설을 명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북방으로의 적극적인 영토 확장 작전으로 인해 생캉탱은 국경 근처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19세기 초에 성벽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1870년~1871년의 보불 전쟁에서 생캉탱은 두 번이나 전장이 되었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에 위치하여 소모전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았다. 생캉탱 바실리카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구시가지의 거의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thumb 동안의 생캉탱 폐허]]
2. 5. 현대
베르망두아 백작령의 수도였던 생캉탱은 10세기부터 카롤링거 왕조, 이후 카페 왕조 가문의 후손인 베르망두아 백작의 통치 아래 급속히 성장했다. 12세기 후반에는 자치 헌장을 획득하여 중세 코뮌으로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13세기 초 중세 프랑스의 왕령지에 편입된 생캉탱은 양모 직물 산업과 샹파뉴 박람회, 플랑드르 도시 사이의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 또한 풍요로운 농업 지역에서 곡물과 대청(쪽) 거래로 이익을 얻었다.
14세기부터 생캉탱은 전략적 위치 때문에 백년 전쟁으로 고통받았고, 15세기에는 프랑스 국왕과 부르고뉴 공작 사이의 분쟁에 휘말렸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위기에 처했으며, 직물 산업은 린넨 캔버스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2년간 버려졌다가 1559년에 프랑스로 반환된 후 대대적인 요새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까지 전쟁, 흑사병, 기근으로 고통받았지만,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의 정복으로 국경이 이동하면서 전략적 역할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16세기 말부터 직물 생산은 고급 아마포 캔버스(바티스트와 론)를 전문으로 하여 18세기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되며 번영을 누렸다.
프랑스 제1제국 시대에는 수출 시장의 어려움으로 경제가 쇠퇴했지만,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요새가 철거되면서 도시가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1814-1815년에는 러시아군에 점령되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19세기 생캉탱은 직물과 기계 장치를 중심으로 산업 도시로 발전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이던 1870년, 프로이센군을 격퇴했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71년 1월 19일 프랑스군은 이 도시 근처에서 패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생캉탱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14년 9월 점령된 후 가혹한 점령을 겪었고, 1916년부터 힌덴부르크 선에 통합되면서 전쟁 지대의 중심에 놓였다. 주민 대피 후 도시는 약탈당하고 산업 설비가 파괴되었으며, 전투로 건물 80%가 손상되었다.
재건 과정은 오래 걸렸고, 19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1911년 수준의 인구를 회복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번영했으나, 이후 섬유 산업이 개발 도상국과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생캉탱은 12세기에 프랑스 왕국의 직할령이 되었고, 왕국의 북쪽 끝이라는 매우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15세기 후반에는 잠시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557년에 유럽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생캉탱에서 충돌했다. 네덜란드에서 공격해 온 스페인은 첫 단계에서 큰 타격을 입혔지만, 생캉탱을 함락시키기까지 약 한 달이 걸렸다.
고전 끝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150km 정도 떨어진 파리 공격을 단념하고,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스페인 국왕은 생캉탱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보상으로 1563년에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에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건설을 명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북방으로의 적극적인 영토 확장 작전으로 인해 생캉탱은 국경 근처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성벽은 19세기 초에 해체되었다.
1870년~1871년의 보불 전쟁에서 생캉탱은 두 번이나 전장이 되었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에 위치하여 소모전의 피해를 정면으로 받았다. 생캉탱 바실리카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구시가지의 거의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3. 행정
생캉탱은 엔주의 아롱디스망이다. 생캉탱이 앤주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주도는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라옹이다. 현재 시장은 공화당 소속의 프레데리크 마카레즈[1]이다.
3. 1. 역대 시장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이름 | 정당 |
---|---|---|---|
2016년 | 현재 | 프레데리크 마카레즈 | 공화당[1] |
2010년 | 2016년 | 자비에르 베르트랑 | UMP |
1995년 | 2010년 | 피에르 앙드레 | UMP |
1989년 | 1995년 | 다니엘 르 뫼르 | PCF |
1983년 | 1989년 | 자크 브라코니에 | RPR |
1977년 | 1983년 | 다니엘 르 뫼르 | PCF |
1966년 | 1977년 | 자크 브라코니에 | UDR |
4. 인구
연도 | 인구 |
---|---|
1793 | 10800 |
1800 | 10477 |
1806 | 10535 |
1821 | 12351 |
1831 | 17686 |
1836 | 20570 |
1841 | 21400 |
1846 | 23852 |
1851 | 24953 |
1856 | 26887 |
1861 | 30790 |
1866 | 32690 |
1872 | 34811 |
1876 | 38924 |
1881 | 45838 |
1886 | 47353 |
1891 | 47551 |
1896 | 48868 |
1901 | 50278 |
1906 | 52768 |
1911 | 55571 |
1921 | 37345 |
1926 | 49683 |
1931 | 49448 |
1936 | 49028 |
1946 | 48556 |
1954 | 53866 |
1962 | 61071 |
1968 | 64196 |
1975 | 67243 |
1982 | 63567 |
1990 | 60644 |
1999 | 59066 |
2007 | 56471 |
2012 | 56217 |
2017 | 53816 |
5. 기후
생캉탱의 기후는 1981년부터 2010년까지의 평균 데이터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11][12]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최고 기온 기록 (°C) | 14.9 | 19.2 | 23.1 | 27.8 | 30.3 | 36.6 | 35.9 | 37.9 | 31.8 | 27.8 | 19.6 | 16.8 | 37.9 |
평균 최고 기온 (°C) | 5.5 | 6.6 | 10.6 | 14.0 | 17.9 | 20.7 | 23.4 | 23.4 | 19.6 | 14.9 | 9.3 | 5.9 | 14.4 |
평균 최저 기온 (°C) | 0.6 | 0.6 | 3.0 | 4.5 | 8.2 | 10.6 | 12.5 | 12.4 | 10.1 | 7.3 | 3.6 | 1.3 | 6.3 |
최저 기온 기록 (°C) | -19.3 | -18.6 | -11.5 | -7.8 | -2.1 | 0.0 | 3.5 | 3.2 | -1.0 | -4.8 | -9.6 | -14.6 | -19.3 |
강수량 (mm) | 57.2 | 48.0 | 57.7 | 48.1 | 61.6 | 60.6 | 60.6 | 67.9 | 52.5 | 64.4 | 58.4 | 65.6 | 702.6 |
평균 강수 일수 | 10.9 | 9.6 | 11.2 | 9.7 | 10.6 | 9.7 | 9.0 | 9.1 | 9.3 | 10.5 | 11.1 | 11.7 | 122.5 |
평균 적설 일수 | 4.9 | 4.1 | 3.4 | 1.2 | 0.1 | 0.0 | 0.0 | 0.0 | 0.0 | 0.0 | 1.6 | 3.3 | 18.6 |
평균 상대 습도 (%) | 89 | 85 | 82 | 78 | 78 | 79 | 79 | 78 | 82 | 87 | 89 | 90 | 83 |
평균 일조 시간 | 68.0 | 75.0 | 128.3 | 174.8 | 198.7 | 203.5 | 208.2 | 206.6 | 162.1 | 116.9 | 66.7 | 51.1 | 1659.9 |
1991년부터 2020년까지의 평균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2][3]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최고 기온 기록 (°C) | 14.9 | 19.2 | 23.6 | 27.8 | 31.2 | 36.6 | 40.7 | 37.9 | 34.0 | 27.8 | 19.9 | 16.8 | 40.7 |
평균 최고 기온 (°C) | 6.0 | 7.1 | 11.2 | 15.0 | 18.4 | 21.5 | 24.0 | 23.9 | 20.2 | 15.2 | 9.8 | 6.5 | 14.9 |
평균 기온 (°C) | 3.6 | 4.2 | 7.2 | 10.0 | 13.4 | 16.2 | 18.4 | 18.4 | 15.2 | 11.4 | 6.9 | 4.1 | 10.8 |
평균 최저 기온 (°C) | 1.1 | 1.2 | 3.1 | 4.9 | 8.3 | 11.0 | 12.9 | 12.9 | 10.3 | 7.6 | 4.1 | 1.7 | 6.6 |
최저 기온 기록 (°C) | -20.0 | -18.6 | -11.5 | -7.8 | -2.1 | 0.0 | 3.5 | 3.2 | -1.0 | -4.8 | -9.6 | -14.6 | -20.0 |
강수량 (mm) | 54.1 | 48.0 | 51.3 | 43.2 | 57.1 | 59.8 | 60.2 | 70.8 | 51.4 | 60.3 | 56.8 | 70.4 | 683.4 |
평균 강수 일수 | 10.7 | 10.1 | 10.0 | 9.2 | 9.6 | 9.1 | 8.8 | 9.4 | 9.0 | 10.3 | 11.4 | 12.2 | 119.9 |
평균 일조 시간 | 61.7 | 79.2 | 134.8 | 182.6 | 205.7 | 207.7 | 213.8 | 206.5 | 167.1 | 115.7 | 66.9 | 54.2 | 1695.8 |
6. 문화
생캉탱은 생캉탱 대성당, 생캉탱 시청, 장 빌라르 시립 극장, 베귀나주, 페르바크 궁전, 포르트 데 카노니에 등 중세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다양한 건축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7][8][9]
또한, 60만 마리 이상의 곤충 표본을 소장한 나비 박물관, 모리스 캥탱 드 라 투르의 파스텔 작품을 소장한 앙투안 르퀴예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인 학술 협회 등이 있다.
6. 1. 문화 유산
- 생캉탱 대성당: 12~15세기에 건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아치, 창문, 지붕이 복원되었다.[7]
- 생캉탱 시청: 1331년에서 1509년 사이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37개의 종소리로 유명하다. 19세기에 개조되었으며, 1926년 아르데코 양식으로 대대적인 복원을 거쳤다.[8]
- 장 빌라르 시립 극장: 1844년에 건축되었다.[9]
- 중세 시대부터 여러 개의 베귀나주가 도시에 있다.
- 페르바크 궁전: 1897년에서 1911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고등 법원이 위치해 있다.
- 포르트 데 카노니에: 17세기 도시 문
- '''바실리카'''
생캉탱의 유래가 된 성 캉탱의 유골은 중심부의 바실리카에 안치되어 있다. 13세기에 성유물에 대한 순례자가 많아짐에 따라 바실리카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재정 등의 문제로 건설이 2세기나 지연된 결과, 바실리카에는 다양한 시대의 고딕 건축 양식이 도입되었고, 르네상스 초기의 요소도 보인다.
- '''아르데코 건축'''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부흥 과정에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건축이 많이 사용되었다. 현재, 생캉탱에는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이 3,000곳 이상 존재한다.
6. 2. 박물관
- '''나비 박물관''': 60만 마리 이상의 곤충 표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상시 2만 점을 전시하고 있다.
- '''앙투안 르퀴예 박물관''': 모리스 캥탱 드 라 투르의 파스텔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 '''학술 협회''': 고고학 박물관 [http://www.sastq.fr/ Société Académique de Saint-Quentin]
6. 3. 아르데코 건축
제1차 세계 대전 후 부흥 과정에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건축이 많이 사용되었다. 현재 생캉탱에는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이 3,000곳 이상 존재한다.7. 교통
생캉탱역은 파리, 랭스, 아미앵, 릴 및 여러 지역으로 연결되는 기차역이다. A26 고속도로는 생캉탱을 랭스 및 칼레와 연결하며, A29 고속도로는 아미앵과 연결한다.
8. 자매 도시
생캉탱은 다음과 같은 도시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10]
국가 | 도시 |
---|---|
독일 | 카이저슬라우테른 |
잉글랜드 | 로더럼 |
스페인 |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 |
중국 | 퉁저우 (베이징) |
9. 주요 인물
- 알렉시 예트나, 농구 선수[1]
- 비비안 아듀토르, 농구 선수[1]
- 앤서니 베네제, 미국의 노예 폐지론자[1]
- 생캉탱의 듀도 (ca. 965년 출생), 역사가[1]
- 샤를 드 부엘 (1479–1567), 철학자, 수학자 및 언어학자[1]
- 겡탱-클로드 벙디에 (1677년 사망), 학자이자 서지학자[1]
- 윌리엄 클리프, 기계로 짠 얇은 그물 발명가[1]
- 마르크 델마스 (1885–1931), 표현주의 작곡가이자 전기 작가[1]
- 잔마리 드 마이유 (1331-1414), 성녀[1]
- 앙투안 프랑시스크 (c.1570–1605),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1]
- 쥘 갈레 (1822–1897), 변호사이자 음악 역사가[1]
- 알렉상드르 아베 (1858-1896), 정치인[1]
- 루디 고베어 (1992년 출생), NBA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소속 프로 농구 선수; 4회 NBA 올해의 수비 선수상 수상[1]
- 카페티엔 고미스 (1980년 출생), 운동선수[1]
- 에티엔 멘디 (1969년 출생), 축구 선수[1]
- 장 루이 마리 푸아레 (1755–1834), 식물학자이자 탐험가[1]
-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1760–1797), ''그라쿠스 바뵈프''로 알려짐,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 선동가이자 언론인[1]
- 샤를 로지에 (1800–1885), 벨기에의 정치가[1]
- 펠릭스 다뱅 (1807–1836), 프랑스 시인이자 언론인[1]
- 장 르네 (1889 - 1944), 종군 기자, 작가, 장교, 프랑스 레지스탕스 회원[1]
- 앙드레 트로크메, 평화주의적 개신교 교회 지도자[1]
- 이브 벨랑 (1925-2017), 스위스 작가[1]
- 장마리 르페브르 (1953년 출생), 모더니즘 및 미니멀리즘 시인[1]
- 자비에르 베르트랑 (1965년 출생), 프랑수아 피용의 두 번째 정부에서 전 노동, 사회 관계, 가족 및 연대부 장관, 보수주의자[1]
- 에두아르 뤼시앵 브리케 (1854-1905), 기술자, 포위된 파리를 떠나 1870년대에 트랜스 사하라 철도 건설에 참여, 1883년 브라질로 이주하여 브라질 내륙 지역의 여러 철도에서 근무[1]
- 마이아 히르시 (2003년 출생), 2023년 WNBA의 미네소타 링크스에 지명된 농구 선수[1]
- 마티외 드 블레빌, 16세기 초 생캉탱 출생, 유리화(스테인드 글라스) 화가[1]
- 피에르 베르통 (16세기), "피에르 드 생캉탱", 석공[1]
- 율리스 뷔탕 (1838–1883), 화가[1]
- 존 크로스 (1819-1861), 생캉탱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한 영국 화가[1]
- 브누아 들레핀 (1958-), 각본가, 배우[1]
- 미셸 도리니 (1617–1665), 화가이자 판화가, 파리 회화 아카데미 교수[1]
- 델핀 글레즈 (1973-), 영화 감독[1]
- 폴 기라망 (1926–2007), 화가, 1953년 로마 대상 수상자[1]
- 에두아르 이폴리트 마르고테 (1848–1887), 화가[1]
- 아르튀르 미디 (1887–1944), 화가[1]
- 아메데 오장팡 (1886–1966), 1920년대 아방가르드 운동인 퓨리즘의 지도자[1]
- 장-크리스토프 파레 (1957-), 무용가이자 교사[1]
- 줄리-마리 파르망티에 (1981-), 여배우[1]
- 모리스 필라르 디 베르누이 (1869년 4월 29일 출생; 1942년 제네바 사망), 아르누보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1]
-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 (1704–1788), 파스텔 화가, 그의 초상화로 유명해졌으며, 루이 15세의 공식 초상화가이자, 생캉탱의 은인(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 디자인 학교 설립)[1]
10. 사건/사고
2013년 3월 30일, 생캉탱에서 주택 화재로 인해 두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아이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아이들의 부모는 최근 별거했으며, 아버지는 아이들이 엄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주말 동안 처음으로 새 집에서 아이들을 맞이했다. 현지 시간으로 3월 30일 오후 10시 30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1] 아이들의 아버지와 이웃들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응급 서비스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1] 건물은 "진입하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졌고, 화재가 진압된 후에 다섯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구하려다 심하게 화상을 입고 안전을 위해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1] 그는 입원했으며, 3월 31일 늦게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Répertoire national des élus: les maires
https://www.data.gou[...]
2020-12-02
[2]
웹사이트
Données climatiques de la station de Saint-Quentin
http://www.meteofran[...]
Meteo France
2016-01-14
[3]
웹사이트
Climat Picardie
http://www.meteofran[...]
Meteo France
2016-01-12
[4]
웹사이트
Normes et records 1961-1990: Saint-Quentin - Roupy (02) - altitude 98m
http://www.infoclima[...]
Infoclimat
2016-01-14
[5]
문서
Saint-Quentin
Cassini-Ehess
[6]
INSEE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7]
문화재
L'ancienne collégiale royale, puis église paroissiale, actuellement basilique Saint-Quentin
Base Mérimée
[8]
문화재
Hôtel de ville
Base Mérimée
[9]
문화재
Théâtre municipal
Base Mérimée
[10]
웹사이트
Jumelages
https://www.saint-qu[...]
Saint-Quentin
2019-11-18
[11]
웹인용
Données climatiques de la station de Saint-Quentin
https://web.archive.[...]
Meteo France
2016-01-14
[12]
웹인용
Climat Picardie
https://web.archive.[...]
Meteo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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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Normes et records 1961-1990: Saint-Quentin - Roupy (02) - altitude 9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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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cli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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